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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山:門 2026 가을
PEOPLE
피플┃판소리 원형을 찾기 위한 탐구
소리제전 예술감독 유태평양
박병성


아버지 고 유준열 정읍시립국악단 단장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소리의 세계에 들어선 유태평양은 여섯 살에 세 시간이 넘는 <흥보가>를 완창하며 최연소 완창자로 이름을 알렸다. 일찌감치 ‘소리 신동’으로 주목받았던 그는 10년 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며 또 한 번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이후 지난 10년간 창극단의 중심 단원으로 활약하며 다양한 서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온 국립창극단의 변화와 전성기를 함께했다.

유태평양은 조통달, 성창순 명창을 사사하며 정통 소리꾼의 길을 걸어온 한편, 어린 시절 아프리카 타악을 배우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유학하는 등 일찍부터 낯선 음악과 예술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판소리 사설과 소리를 재즈의 어법으로 풀어낸 <그루브 in 판소리>는 이러한 유태평양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업이다. 오랜 시간 레퍼토리로 이어져 최근까지도 공연되고 있는 이 작품은 전통과 다른 음악적 언어가 만났을 때 판소리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탐색해 온 그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전통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흔히 원형을 보전하는 일과 동시대적 언어로 변형하고 실험하는 일로 나뉜다. 유태평양은 그 두 길을 모두 걸어온 창작자다. 판소리의 원형과 미학을 충실히 익히고 전승하는 동시에, 재즈와 다른 장르의 음악, 창극과 새로운 무대 형식 속에서 소리가 지닌 가능성을 꾸준히 시험해왔다. 그의 작업이 쌓일수록 보전과 실험은 서로 분리된 두 방향이라기보다 하나의 창작 안에서 자연스럽게 겹쳐지기 시작했다.

10년간의 국립창극단 생활을 마치고 올해 독립한 그는 여우락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을 거쳐 서울돈화문국악당의 새로운 브랜딩 공연 ‘소리제전’의 예술감독을 맡았다. 2026년 <소리제전: 소리연애(戀愛)>는 그가 오랫동안 이어온 판소리의 전승과 확장, 보전과 실험의 경험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무대다. 유태평양은 “어쩌면 그동안 해온 작업들이 이번 작업을 하기 위한 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가 여러 장르와 형식으로 소리를 확장해 온 끝에 다시 바라본 ‘소리의 원형’은 무엇일까. 그 원형에서 출발해 <소리제전: 소리연애>에서 새롭게 펼쳐 보이고자 한 소리는 어떤 모습일까.

  

연극성을 강조한 판소리

- 국립창극단을 나와 독립한 해에 <소리제전>의 예술감독을 맡게 됐습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창극단을 나오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해보고 싶은지 나름대로 방향을 정해놓고 있었어요. 무대 위에서 실연하는 사람에 머물지 않고, 다른 실연자들을 위한 새로운 무대를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제가 생각했던 방향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크게 고민하지 않고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서울돈화문국악당이라는 공간이 중요했어요. 자연음향을 지향하는 공연장이고, 무대 형태도 옛날의 마당과 닮아 있잖아요. 저에게 돈화문국악당은 전통이나 우리의 원형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이곳에서 대단히 새로운 무엇인가를 덧붙이기보다 오히려 원형에서 출발해보는 것이 중요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원형 안에서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판소리의 요소를 다시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 판소리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요소는 무엇인가요?

“판소리와 창극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분명합니다. 특히 완창 판소리는 아무래도 소리에 집중합니다. 소리꾼의 음악적 역량이 가장 중요하고, 연기나 발림 같은 요소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비중이 크지 않죠. 반대로 창극은 연극적 요소나 몸짓의 비중이 훨씬 높습니다. 저는 그 사이에 어떤 통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판소리에는 창극에는 없는 굉장한 장점이 있어요. 한 사람이 여러 인물을 자유롭게 오가는 ‘1인 다역’입니다. 그 장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연기적 요소는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어요. 이번 공연에서는 판소리의 발림과 연극성을 조금 더 파고들려고 합니다. 전통적인 완창 공연에서는 소리꾼과 고수만 참여하지만 이번에는 연출가가 함께합니다. 판소리 각 대목에서 어디를 바라볼 것인지, 왜 그곳으로 움직이는지, 어떤 의미로 손을 움직이는지를 제3자의 눈으로 함께 살펴보는 거죠. 대신 소리 자체는 전통 판소리를 최대한 지키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전승받고 배운 소리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어요.”

 

- 판소리를 모노드라마처럼 연극적으로 만드는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을까요?

“조금 다릅니다. 서양 연극에서 완전히 그 인물이 되는 방식과 판소리의 연기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제가 창극에서 심봉사를 맡으면 심봉사의 감정을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판소리에서는 ‘유태평양이 보여주는 심봉사’라는 한 겹의 층이 존재해요. 소리꾼은 자신을 일종의 해설자나 번역자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 심봉사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심봉사는 이렇게 살았어요”라고 이야기하다가 잠깐 심봉사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오는 거죠. 저는 분명히 ‘판소리 안에서만 가능한 연기’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소리꾼과 연출가가 함께 찾아보자는 것이 이번 작업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 연출가가 필요한 이유도 거기에 있겠군요.

“제가 완창을 하면서 “내가 왜 거기에서 저 손을 들었지?”, “왜 저 말을 굳이 했지?”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판소리 발림에는 음악적인 종지 때문에 관습적으로 하는 동작도 많아요. 스승에게 전승받은 동작도 있고, 공연 중 관객의 반응에 따라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연기도 있고요. 그것이 잘 맞으면 굉장히 좋은 효과가 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공연의 흐름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객관적으로 봐주는 제3자의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리꾼들이 연출가에게 바라는 것도 사실 단순해요. ‘의미 없는 발림과 의미 없는 연기를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왜 이 동작을 하고 왜 여기로 움직이는지 명분을 찾아달라’는 것입니다. 즉흥성도 마찬가지예요. 창극단에서 10년 동안 여러 연출가와 작업하면서 제가 절실하게 배운 것이 ‘연습된 애드리브’와 준비되지 않은 애드리브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짜인 판 안에서의 즉흥성이 있어야 합니다. 판소리에도 그런 시스템을 적용한다면 소리꾼의 역량을 오히려 더 돋보이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존과 실험의 만남

- 이번 <소리제전: 소리연애>는 전통예술의 다양한 공연 형태에서 어디쯤 위치한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전통예술에는 크게 두 층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보존이고 다른 하나는 실험입니다. 전승받은 그대로를 무대에서 연행하는 것이 한쪽 끝이라면, 기존의 틀을 거의 해체하고 그 안의 재료만 가지고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다른 한쪽 끝일 겁니다. 저는 그 중간 어딘가를 공략하고 싶었어요. 전통의 것을 가져오지만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조립하는 거죠. 농담처럼 표현하면 ‘조선시대의 그릇을 가져와 그 위에 피자를 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릇은 그대로인데 그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맛은 조금 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 공연에서는 무대장치나 영상 같은 외부적인 요소를 최대한 절제했습니다. <소리제전: 소리연애>에서 소개하는 세 작품이 기본적으로 같은 세트를 사용하고, 소품도 최소화했어요. 판소리는 결국 소리꾼과 고수가 빛나야 하는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판소리가 대단한 세트도 조명도 없이 마당에서 공연됐습니다. 부채 하나를 든 소리꾼과 고수가 사람들을 몇 시간씩 붙들어 놓았어요. 그들이 가만히 서서 소리만 했을까? 분명 연기도 하고 몸짓도 하고 관객들과 끊임없이 교감했을 겁니다. 저는 오히려 그런 원초적인 힘을 지금의 관객에게 다시 보여주려고 합니다.” 

 

- 과거의 관객과 오늘날의 관객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전통적인 형식으로 현대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시나요?

“옛날의 공연자를 그대로 데려와 지금 공연한다면 당연히 시대적인 차이가 크게 느껴질 겁니다. 그러나 옛날의 재료를 가지고 지금을 사는 창작자들이 작업한다면 동시대 사람들이 공감할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국립창극단에서 작업하면서 확인한 것이기도 하고요. 이번에 사용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사설의 편집입니다. 같은 판소리 사설이라도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순서로 배치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진도 같은 장면을 어디까지 프레임 안에 넣고 어디를 잘라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잖아요. 판소리 역시 전체 사설 가운데 무엇을 보여주고 어떤 관점으로 배열하느냐에 따라 주제도, 관객이 느끼는 흥미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연출가와 함께 사설을 어떻게 편집하고 배열할 것인지, 또 어떤 몸짓과 방식으로 소리를 전달할 것인지에 집중하려 합니다.”

 

- 이번에 심청가, 춘향가, 적벽가를 선택한 것도 그런 가능성 때문인가요?

“처음부터 그 세 바탕을 생각했습니다. 흥보가와 수궁가는 원래도 굉장히 재미있는 판소리예요. 그래서 오히려 너무 익숙하고 안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연극적인 요소를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심청가와 춘향가, 적벽가가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적벽가는 창극으로 만들기 굉장히 어려운 작품이지만 저는 어릴 때 박동진 선생님의 <적벽가> 완창 영상을 무척 재미있게 봤어요. 창극으로 만들기는 어려워도 한 명이 하는 판소리로는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기억이 오래 남아 있습니다. 참여하는 소리꾼을 정할 때도 소리를 잘하고 완창 경험이 있는 것은 기본이지만, 연극적인 공연을 소화할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봤습니다. 그리고 창극 경험이 있는 연출가들을 연결했어요. 판소리를 연극으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판소리 자체가 지닌 연극성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이 장르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 제목이 <소리제전: 소리연애>입니다. ‘연애’라는 말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나요?

“아주 직관적으로 떠오른 제목이에요. ‘연기와 사랑에 빠진 소리’라는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연회’라는 말도 있잖아요. <소리제전> 자체가 하나의 잔치이고 연회였으면 좋겠다는 의미도 있었고요. 한자로 풀었을 때 연기적인 요소와 사랑이라는 의미가 함께 연결되는, 여러 겹의 뜻이 들어갔으면 했습니다.”

 

- 이번 공연을 통해 가장 얻고 싶은 성과는 무엇인가요?

“하나의 방식을 제시하는 공연이 되었으면 합니다. 관객에게 좋은 공연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오히려 앞으로 판소리를 이어갈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싶어요. 지금까지 완창은 한 명의 소리꾼이 준비해서 무대에 오르는 공연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완창도 하나의 연극이나 뮤지컬을 만들듯 더 많은 공을 들여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대에 서는 사람은 한 명이어도 그 한 편의 공연을 위해 연출가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거죠. 그런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공연의 완성도도 높아지고 소리꾼 개인의 능력도 더욱 돋보일 수 있습니다. 

신재효 선생의 단편가사 <광대가>에는 광대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 너름새를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마다 오늘날 배우에게 요구되는 덕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득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무대 위에 존재하는지,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하고 전달하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이미 그 시대에도 중요한 문제였던 겁니다. 오늘의 광대들은 그 네 가지를 얼마나 잘 이어가고 있었을까. 이번 공연이 그 질문을 다시 한번 던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판소리 완창을 이렇게 만들 수 있구나’라는 작은 출발점이 되어 새로운 양식으로 계속 발전해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박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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