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s
Korean

A
English
웹진 山:門 2026 여름
COLUMN
칼럼┃전통예술 기획자 양성이 필요한 이유
천재현


기획자가 없다

전통예술의 현장에 기획자가 없습니다. 오래된 현상입니다. 단체 대표들이 만나면 인사처럼 묻는 말이 있었습니다. “좋은 기획자 좀 없어요?” 다양한 기초문화재단이 생겨나던 무렵, 민간 예술현장의 기획자들은 조금 더 안정된 곳을 찾아 떠났고, 빈자리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현장의 경험을 안고 공공기관으로 옮겨가는 것이었으니, 꿈이 현실을 이기지 못한 이별이었을지언정 이 바닥을 알고 자란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떠날 사람조차 없습니다.

예술현장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생태계입니다. 공동체 같았던 단체의 감각은 사라졌고, 낭만이나 환상으로 버티는 일은 이제 불가능합니다. 직업으로서의 예술, 그 방식이 아주 분명해졌습니다. 예술도 달라졌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술을 품은 생태계의 변화입니다. 그 생태계 안에서 기획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획자가 없어서 현장이 약해지고, 약해진 현장은 기획자를 불러들이지 못하며, 그 안에서 기획자가 자라지도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이 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전통예술은 예술가의 것으로만 명맥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밭을 일굴 사람 없이, 씨 뿌리는 사람만 남는 것입니다.

 

기획자란 어떤 사람인가

기획자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그래서 ‘사이’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술과 관객 사이, 예술가와 기술감독 사이, 예술가와 극장 사이, 예술과 돈 사이, 정책과 예술 사이, 매체와 예술 사이. 그 모든 사이사이에서 스스로 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기획자입니다. 큰 조직에서는 업무가 분업화되어 있지만, 민간 예술현장에서 기획자는 제작비를 마련하고, 공연을 설계하고, 예술가와 작품을 함께 빚고, 무대 위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도록 조율하며, 관객과의 접점을 만들고, 공연이 끝난 뒤 그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남기는 사람입니다. 기획 아닌 것이 없고, 기획자가 하지 않아야 할 일이 없으며, 그렇기에 책임지지 않는 영역도 없습니다. 무겁고 버겁습니다.

 그런데 기획자만큼 멋있는 일도 없습니다. 기획자의 상상은 현실이 됩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직업이고, 어느 때는 예술가만큼, 아니 그보다 더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꿈이 현실과 충돌하는 모든 지점을 온몸으로 버텨야 하는 것만 감내한다면 말입니다. 사이에 산다는 것은 가능과 긴장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들이 낭만적이고 무책임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실을 더 분명하게 공유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예술가가 되고 기획자가 됩니다. 어쩌다 보니 되어 있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따금 묻습니다. 왜 이 일을 합니까? 왜 예술가와 함께 꿈과 현실 사이에서 땀 흘리십니까? 예술이 좋다고, 예술가가 좋다고 이야기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예술이 만들어내는 현상, 예술이 삶과 영혼에 작용하는 힘, 그 아름다움의 가치에 이끌려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종종 이 일을 농사에, 우리를 농부에 비유합니다. 좋은 땅을 알아보고, 계절을 읽고, 정성으로 가꾼 건강한 농산물을 들고 한껏 웃으며 사람들을 만나는 사람. 기획자는 그런 농부입니다.

 

우리가 일구는 밭 : 전통

그렇다면 우리의 밭은 어떤 땅일까요. 우리는 흔히 전통을 ‘옛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옛것도 지금의 필요에 의해 현재의 가치가 생기고, 지금의 맥락 안에서 현존합니다. 옛것이 현존의 가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존의 가치가 옛것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통은 그 이유와 시작이 현재적이고 동시대적입니다. 동시대적이지 않은 예술은 사라집니다. 사라진 전통과 살아있는 전통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통이라는 표현은 옛것이지만, 그 뜻은 동시대 예술의 특별한 종류입니다. 그러니 전통의 동시대성을 획득하겠다는 말보다는, 전통을 품은 동시대의 필요를 밝혀내는 일이 우리의 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통예술 기획자의 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낡은 말에 갇힌 전통을 지금의 언어로 풀어내고, 지금의 감각으로 관객과 연결하는 일. 이것은 일반 공연기획자에게는 없는 과제입니다. 예술적 감수성과 실무 역량 위에, 전통을 현재로서 읽어내는 눈이 함께 요구됩니다. 과거와 현재 ‘사이’, 전승과 창조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이 감각은 상당한 훈련 없이는 닿기 어렵습니다. 땅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전농스쿨이 필요한 이유

기획자는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예술이 좋아서 시작한 사람, 예술경영을 전공한 사람, 직접 예술을 했던 사람, 우연히 현장에 발을 들인 사람. 기획자의 수만큼 다양한 경로가 있지만, 공통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기획자의 일은 결국 현장이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큰 조직에서는 시스템이 일을 가르치지만, 민간 예술현장은 사람과 현장이 스승입니다. 


그런데 사람과 현장이 스승인데, 사람도 없고 현장도 팍팍합니다. 안정적인 제작 환경은 부족하고, 진입 경로는 불분명하며, 선배 기획자의 경험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통로가 없습니다. 현장은 사람이 만드는데, 그 사람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이유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사람을 키워내는 것, 기획자를 키워내는 것이 방법인 줄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한두 번의 특강으로는 이 구조를 바꿀 수 없습니다. 기획은 지식이 아니라 감각이고, 정보가 아니라 판단력이며,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익힌 감이기 때문입니다. 농사가 책으로 배워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현장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전농스쿨은 이런 답답함에서 시작된 제안입니다. 예술가와 예술 자체를 육성하는 사업은 많습니다. 저 역시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사업의 책임을 맡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선명하게 느낍니다. 전통예술계에는 기획자 양성이 절실합니다. 전통예술계를 건강하게 일구고 연결해낼 매개자, 기획자가 절실합니다. 정말 절실한 마음으로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전농스쿨의 방법

기획자 양성 교육의 핵심 방식으로 제안하고 싶은 것은 도제식 교육입니다. 현장에 깊이 뿌리내린 선배들과 함께, 충분한 시간 동안 실제의 일을 하며 배웁니다. 기본소양을 기르는 것뿐만 아니라, 기획자를 필요로 하는 예술단체들과 직접 매칭하여 현장 경험을 쌓고, 강사들이 그 과정을 코칭합니다. 그 과정 하나하나를 강사들과 함께 만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서울남산국악당의 기획 프로그램을 직접 제작해 봄으로써, 기획자로서의 온전한 한 사이클을 경험하도록 설계했습니다.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현장 안에서 현장을 배우는 구조입니다. 밭에서 농사를 배우는 것입니다.


 

전농스쿨의 강사진이 그 구조의 핵심입니다. 김서령, 계명국, 조영선. 각자의 영역을 오랜 시간 일구어 왔으며, 서로 다른 현장을 넘나들며 감각과 현실 인식을 키워온 이들입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강사가 아닙니다. 흔들리고 부딪히며 뿌리와 근육을 키워온 사람들입니다. 무용과 전통예술을 기반으로 다원적 공연 창제작을 이어온 김서령, 재즈와 공연장에서 시작해 국악과 월드뮤직, 그리고 축제로 활동의 영역을 넓혀온 계명국, 극장과 거리, 공공과 민간 사이를 조율하며 축제를 일궈온 조영선. 현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면서도 충분히 익은 사람들입니다. 이 선생님들의 근육에 붙은 감각이, 실패와 성공의 경험들이 다음 세대와 온전히 교류되기를 바랍니다. 전통의 현장은 제도와 시스템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결국은 사람입니다. 전농스쿨은 사람이 사람을 만드는 자리입니다.

 

사이에서 태어나는 것들

기획자는 ‘사이’에 있는 사람입니다. 사이에는 틈이 존재하고, 그 틈에서 새로움이 발생합니다. 사이는 규정되지 않습니다. 비어 있어 오히려 가득하고, 비어 있어 무궁합니다. 전통의 안과 밖, 과거와 현재, 예술과 삶의 ‘사이’에서 고유함을 만들어내는 사람. 그 공간은 지금 비어 있습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무한합니다.

혹시 이 글을 읽으며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면, 당신이 바로 그 사이에 설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전농스쿨은 사이를 일굴 사람을 찾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전통예술의 현장은 기획자 없이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획자는 현장 없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전농스쿨은 이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붙들고, 그 사이에서 답을 만들어가는 시도입니다. 전통의 밭을 일구는 건강한 농부를 만드는 곳, 전농스쿨입니다.​ 

천재현
2000년 정가악회를 만들었다. ‘국악의 밭을 일구는 건강한 농부’가 되자며 스스로를 단련했고, 공연을 만들고 예술가를 재교육하며 축제를 일구는 삶을 살았다. 2023년 정가악회의 문을 닫았다. ‘문을 닫았다’는 표현도 맞지만, 정가악회라는 울타리를 풀었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지금은 울타리 없이 여기저기서 하던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천재현
2000년 정가악회를 만들었다. ‘국악의 밭을 일구는 건강한 농부’가 되자며 스스로를 단련했고, 공연을 만들고 예술가를 재교육하며 축제를 일구는 삶을 살았다. 2023년 정가악회의 문을 닫았다. ‘문을 닫았다’는 표현도 맞지만, 정가악회라는 울타리를 풀었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지금은 울타리 없이 여기저기서 하던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인스타그램 위젯
인스타그램
월간일정 위젯
월간일정
오시는길 위젯
오시는길
주차안내 위젯
주차안내
대관서식 위젯
대관서식
문의하기위젯
문의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