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위나 봉장취는 ㉠일정한 장단틀에 메이지 않은 ㉡즉흥성을 띤 가락들의 ㉢기악곡이다. 이 음악은 ㉠느린 데서 빠른 데로 진행되는 장단틀의 정형성 ㉡판소리의 음악 어법을 닮은 선율짜임 등 정교하게 짜여진 가락에 음악의 형식을 갖춘 산조에 비교할 때 매우 단순한 형태이다. (김해숙‧백대웅‧최태현, 『전통음악개론』)”
우리는 오늘날에도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시나위를 통해 산조의 조상을 가늠해본다. 소설가 김훈은 “저마다 제 각기의 전혀 다른 선율을 연주”하는 시나위를 “불협화음의 음악”으로 보았다. 서양음악적 관점으로 보면 불협의 음악이지만, 한국인의 심성으로 본 시나위는 다르다고 그는 말한다. “시나위는 이 무질서를 음악적 질서에로 끌어올리면서 강력한 표현력과 설득력을 갖춘다.” 그리고 시나위는 “저 자신의 음악적 양식을 판소리나 기악산조에로 녹아들게 하는 수용능력”을 갖는다. (김훈, 「불협화음으로 엮은 조화-산조의 바탕」)
장단은 느린 데서 빠른 데로 몰아간다. 이러한 속도의 틀은 곡의 움직임을 크게 바라보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황병기는 “느린 장단으로 시작하여 차츰 빨라진다는 면에서 인도의 라가 연주와 흡사”하다고도 말한 바 있다(나효신, 『황병기와의 대화』). 그래서 산조는 ‘느린 음악’과 ‘빠른 대목’이라는 주어보다, ‘느리게 시작하여 빨라진다’는 동사가 더 중요한 음악이다. 일명 짧은 산조도 이러한 흐름의 미감을 ‘짧게나마’ 느끼라고 만든 근대적 고안물이다. 특정 장단이나 대목을 떼어 만든 ‘부분 산조’가 없는 이유도 이와 같다. 그래서 산조를 담은 음반 중에는 장단을 트랙별로 나누지 않은 것도 있다. 하나의 트랙만 존재하게 하여, 이 흐름에 대한 존중을 표하는 것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뿌리깊은나무 조선소리 선집>은 이러한 녹음방식으로 유명했다.
산조가 오르는 무대에도 연주자와 반주자뿐이다. 장단을 짚는 고수는 ‘점(點)’을 찍고, 연주자는 그 점 위에 선율(旋律)의 ‘선(線)’을 그린다. 연주자는 문장을 쓰고, 반주자는 쉼표와 온점을 찍는 셈이다. 이러한 장단은 산조의 내재적 요소이기도 하지만 다른 음악에 비해 상당히 ‘표면화’되어 있다. 그래서 산조를 듣고 이해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국악의 여러 종류를 감상하다 보면 산조처럼 장단의 구조를 금방 드러내는 곡도 있지만, 궁중음악합주나 <영산회상>의 상령산‧중령산‧세령산, 그리고 가곡 같은 음악은 장단의 주기가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기도 해서 어렵게 느껴지게 마련이다.”(송혜진, 『국악 이렇게 들어보세요』)함부로 넘을 수 없는 산맥인 셈이다. 그 산맥 안에는 한국음악이 갖춰야 할 소리의 의식주가 모두 들어 있다.
이러한 산조는 음악사(史)에 완전히 정착했다. 음악가들에 의해 틀과 모양새라는 공간성, 정형화라는 시간성을 두루 거친 결과다. 이로 인해 보존과 전승에는 유리해졌다. 하지만 산조는 변화의 음악이다. 끊임없이 해체(散)하고, 음악적 요소들로 조율(調)해야 하는 음악이다. 그래서 ‘산조(散調)’란 형식을 지칭하는 용어일 뿐만 아니라, 음악가들이 행해야 할 강령이기도 하다. 분해하고 분해하여 다시 만들라.
하지만 오늘날 산조는 정형화라는, 박제의 또 다른 옷을 입고 있다. 시인 황지우는 「바람이 데려간 강강술래」에서 박제된 강강술래의 아쉬움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삶과 일상에서 변화되는 산조가, 그 맥락을 끊고 무대에 오르면서 놓고 간 것을 생각해 보게 한다.“기호가 문맥 속에서 의미를 실어나르듯이, 삶 속에서 작용하는 춤, 일 속에서 틈틈이 솟구치는 ‘양생적인 강강술래’를 보기를 우리는 원했다. 그러나 그런 날것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날것은 이미 훈제되어 생것의 물기가 거의 빠져 있었다. 강강술래는 ‘추억’이었다.(황지우, 「바람이 데려간 강강술래」)”
서울돈화문국악당의 <산조대전>은 ‘어제의 산조’와 ‘오늘의 산조’가 공존하는 시간이다. 어제의 음악을 오늘, 재연(再演)하고 재현(再現)한다. 오늘날 ‘전승’과 ‘창작’으로 양분된 국악계에서 ‘재연’은 전승 계통의 주를 이루는 방법이다. 한편, 음악가들은 이러한 재연을 통해 음악의 유산을 답습하고 배운다. 하지만 머리가 크면 어느 순간 이것을 놓아버린다. 그리고 그들이 향하는 곳은 새로운 음악이 몰려 있는 창작의 진영이다. 재연과 재현이, 곧 고리타분한 답습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20세기의 국악은 이러한 답습과 창작의 남북 전진기지에서 일궈온 역사다. 이러한 답습의 역사로만 산조 연주를 본다면 <산조대전>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재연(再演)과 재현(再現)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재(再), ‘다시’라는 말이다. 예술의 발전사를 보면, 영감은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의 동사가 되어 있을 때에야 찾아온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다시 들추고 읽는다, 놓쳤던 문장이 다시 보인다, 다시 읽는다, 그 문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새로운 생각이 오른다, 하여 다시 쓰게 된다, 다시 쓴다. 그리고 ‘다시(再)’ 보여주되, 그것은 예전과 같은 게 아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쪽에서 나온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를 수 있다는 말. 즉 ‘다시’ 나온 색이 원본보다 더 진하다는 뜻이다. 창작음악의 바다에서 오디세이적 여정을 마친 이가, ‘다시’ 산조로 귀향하여, 이 음악을 ‘다시’ 읽고, ‘다시’ 연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그것을 ‘다시’ 들춰보고, ‘다시’ 읽고, ‘다시’ 더듬어, 우리가 나아갈 길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이번 <산조대전>인 셈이다.
음악평론가. ‘한반도의 르네상스’를 주장했던 음악평론가 박용구론으로 제13회 객석예술평론상을 수상했고, 충실한 ‘기록’이 미래를 ‘기획’하는 자료가 된다는 믿음으로 활동 중이다.
| 송현민 |
| 송현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