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굿
강나현의 1인 작창극 <씩씩(Sick Sick)>은 제목부터 묘한 울림을 준다. 씩씩하다는 말이 요즘 청년들에게는 버거운 삶 앞에서 억지로라도 씩씩한 척해야 하는 자조적 다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청년 소리꾼 ‘강’이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풀어내는 이 무대는,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상, 청년 예술가로서 느끼는 불안과 혼란을 전자음악과 판소리로 거침없이 드러낸다.
이 공연의 기획자이자 이야기의 주인공, 소리꾼 강나현은 중앙대 전통예술학부를 졸업하고 ‘판소리공장 바닥소리’와 2인조 국악인디밴드 ‘신수동3평’으로 활동하며, 전통 판소리를 바탕으로 창작과 실험을 이어가는 소리꾼이다. 이번 공연은 강나현이 여태껏 활동 경험을 쌓아온 자신의 창작 소리 세계를 여실히 보여준 무대다.
채정원, 송자연, 김예빈 소리꾼들과 함께 꾸민 이 무대는 8개의 노래로 구성된 한 편의 뮤지컬이었다. 여는굿으로 시작해 <두더지타령>, <마잔(Ma-jan) 타령>, <동상타령>, <아무말가야금산조>, <랑랑모음곡>, <웁스타령>을 거쳐 <이불킥타령>으로 마무리된다. 전통음악에서는 들어볼 수 없는 제목들이지만, 이 노래들은 전통음악의 ‘기경결해(起景結解)’ 흐름을 따라 강이의 성장 서사를 그려낸다. 강나현의 자전적 이야기가 청년 세대 전체의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되는 여정이다.
가야금 현과 장구에 전자음악이 더해져 더욱 극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전통 소리와 현대 음악이 어우러지며 강이의 상황에 몰입하게 했다. 공연은 '여는굿'으로 시작한다. ‘굿’이 갖고 있는 전통 제례의 의미를 요즘 식으로 가볍게 풀어내면서도, 관객과 연주자가 함께 마음을 여는 현대적 초대장으로 기능했다.

두더지 굴속의 27살들
강이의 이야기는 27살을 다룬 <두더지 타령>으로 시작한다. 27살. 이전 세대라면 가정을 꾸리는 것에 집중했을 나이지만, 지금의 청년들에게는 여전히 정체성을 탐색하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사회가 요구하는 성인의 모습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자신 사이의 괴리, 기대했던 것과 다른 현실 앞에서 청년들은 좌절하고, 고립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두더지 타령>은 지난 우울과 좌절의 시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돌아보게 한다. 청년 세대인 나 역시 공연을 보며 ‘나만 이런 시간이 힘들었을 줄 알았는데, 다들 비슷하게 겪는구나’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강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은둔과 고립이 누구든지 겪을 수 있는 성장통임을 보여줬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라는 안도감, 그리고 ‘우리 모두 그렇구나’라는 연대감. 이것이 <씩씩(Sick Sick)>이 건네는 첫 번째 위로다.
자조와 유머로 버티기
<씩씩(Sick Sick)>의 가장 큰 미덕은 무겁고 어두운 주제를 자조와 유머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어머니를 일찍 떠나보낸 딸의 그리움을 담은 <마잔타령>
<동상타령>은 대회에서 금, 은, 동 중에 동상만 타던 강이의 에피소드다. 자조적인 이야기이지만 관객들은 웃으며 들었다. 조금만 더 닿을 수 있는데 못 닿는 뼈저린 좌절. 하지만 강이는 <동상타령>으로 지금껏 존재한 동상의 가치를 재정립했다. 1등이 아니어도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는 메시지. 끊임없이 더 높은 곳을 향해야 할 것 같은 요즘, 강이의 ‘동상 콜렉터’ 고백은 재치 있는 위로로 다가왔다.
<씩씩(Sick Sick)>에서 들려준 동초제 춘향가의 ‘해소식’은 강나현 소리꾼의 재치 있는 통찰이 드러난 대목이었다. 원래 <춘향가> 속 ‘해소식’은 이몽룡이 춘향을 만나러 가려고 밤에 몰래 나가려는 장면이다. 시계가 없던 옛날, 몽룡은 하인인 방자에게 “해를 보았냐?”(=시간이 몇 시냐?)라고 계속 재촉한다.
전통적으로 이 대목은 춘향에게 안달 난 몽룡의 설렘을 표현하는 장면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주인의 재촉에 시달리는 방자의 입장에 더욱 이입하게 된다. 평소 활발하고 기민한 방자조차 몽룡의 끊임없는 재촉에 지쳐, 속으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거라는 해석이 참 기발했다. 본래 대목에서 방자는 이몽룡의 물음에 성실히 대답해 준다. 하지만 강나현의 재해석에서는 방자의 속마음이 드러난다. “오늘은 제가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혼자 있고 싶습니다. 몰러유!!” 속마음은 차마 전해지지 못하고, 이도령은 또 물어온다.
“얘 방자야~”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크게 웃었다. 방자의 속마음에 모두가 공감했을 것이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혹은 관계 속에서 재촉과 압박을 받으며 속마음을 숨긴 경험. 청년만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겠는가. 속마음대로 하진 못하고 결국 또 어쩔 수 없이 하는, 씁쓸한데 웃긴 현실 말이다. 몽룡의 설렘이 아니라 방자의 피로에 주목하고, 주인공이 아닌 조연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니, 수백 년 전 이야기가 지금 우리 이야기처럼 들렸다.
<랑랑모음곡> 역시 춘향가의 <사랑가>를 재해석했다. 춘향과 몽룡이 “이리 오고 저리 가며 업고 놀고, 빵끗 웃어 잇속도 보자”며 사랑을 노래한 그 대목이다. 그네 뛰고 꽃 따고, 달 밝은 밤 사랑 속삭이던 조선시대 연인들의 로맨스. 전통 <사랑가>는 만나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이어지는, 어찌 보면 단순하고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라고 노래하는 강이의 사랑 이야기는 춘향이와 몽룡이 때와 좀 많이 다르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나만 사랑했네”, “그런 사랑 어디 있나.” 외국에서 우연히 만난 스페인 남자와는 언어 장벽 앞에서 감정만 소진됐다.
SNS로 시작해 카톡 읽씹으로 끝나고, 설레는 만남이 어색한 이별로 마무리되는 게 요즘 연애의 진상 아닌가. 옷깃만 스치고 끝나고, 나만 착각하고, 엇갈리기 일쑤인 현대 청년들의 연애 진상 판소리 대표 사랑 타령 <사랑가>도 이제는 버전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요즘 연애 이야기도, 사랑인 줄 알았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아픈 경험도, 그래도 또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담아내야 하니까. 강이는 지금의 <사랑가>를 무대에 올렸다.
<해소식>과 <사랑가>, 두 대목의 재해석을 보며 생각했다. 조선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풍자와 해학을 책임져온 판소리가, 현대 청년의 자조와 유머로도 충분히 살아 숨 쉴 수 있다는 것. 이 무대는 그 생명력을 보여줬다.
여성 판소리의 흐름 속 <씩씩(Sick Sick)>이 갖는 의미
작년 가을에 방영된 드라마 <정년이>가 글로벌 OTT 차트를 휩쓸며 대중들에게 여성 소리꾼들이 재조명되었다. 사실 판소리사에서 여성의 역할은 작지 않았다. 1867년 진채선이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에서 공식적인 여성 명창으로 등장한 이래, 20세기 판소리는 여성 명창들을 중심으로 생명력을 이어왔다. 일제강점기와 분단이라는 민족적 시련 속에서 남성 명창들이 은둔할 때, 이화중선, 김초향, 박록주, 박초월, 김소회 같은 여성 명창들이 판소리의 명맥을 지켰다.
여성 소리꾼들은 전통 판소리 다섯 바탕을 전승해 왔다. 춘향은 이도령을 기다리는 열녀이고, 심청은 아버지를 위해 희생하는 효녀다. 여성의 목소리로 노래했지만, 정해진 서사 안에서였다. 작창극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가능성을 열어준다. 아예 새로운 서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강나현의 <씩씩(Sick Sick)>은 바로 이 가능성을 실현했다. 여성 소리꾼이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한다. 사회에서의 좌절, 엄마에 대한 그리움, 연애의 설렘, 미래에 대한 불안. 이 모든 것이 당사자의 시각에서 서술된다.
물론 <씩씩(Sick Sick)>이 여성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강나현은 구체적 경험을 통해 세대의 보편적 경험을 말한다. 고립과 은둔, 경쟁의 압박은 성별을 초월한 청년 세대의 공통 경험이다. 다만 그 경험을 여성의 목소리로, 구체적 생활 속에서 풀어낸다는 점이 의미 있다.
이런 방식은 사실 낯선 것이 아니다. 여성 명창들이 20세기 판소리의 생명력을 지켜온 방식은 단순한 전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판소리를 부르게 되면서 음란하거나 비속한 대목을 순화하고, 자신들의 정체성과 감성에 맞게 사설을 재구성하거나, 자신의 방식으로 판소리를 재해석하며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 왔다.
강나현의 <씩씩(Sick Sick)>은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전통 대목을 현재의 감정으로 재해석하고, 청년 여성의 경험을 판소리 형식에 담아냈다. 전승받은 것을 그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어낸 것이다.
“흔들리지 말고 쓰러지지 말자”
강이가 <웁스타령>에서 외친 말이다. 사회에서 입지가 좁아지는 불안함 속에서도, 어른들의 ‘줄놀음’에 놀아나지 않고 나를 지키자고. 그리고 <이불킥타령>으로 공연을 마무리했다. 내일 이불킥할지도 모를 일을 오늘 저지르는 용기. “흔들리지 말고 쓰러지지 말자.” 이것이 <씩씩(Sick Sick)>의 핵심 메시지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강인함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흔들릴 수 있고 쓰러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버티고 있는 우리를 격려하는 말이다. 씩씩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강나현이 보여준 씩씩함은 완벽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다시 중심을 찾아가는 것이다. 동상만 타도 괜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도 괜찮고, 이불킥할 일을 저질러도 괜찮다. 두더지처럼 굴속에 숨어 있다가도 언젠가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1등이 아니어도, 강나현의 씩씩(Sick Sick)은 그런 씩씩한 위로를 건넨다. 그 위로는 고립된 개인을 넘어 연대하는 우리로 확장된다. 두더지 굴에서 나온 청년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흔들리며 함께 버티는 것. 그것이 진짜 씩씩함이다.
| 이하영 | |
| 국악 전문 방송 프로그램과 문화예술 방송 프로그램 작가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문화예술 방송 프로그램 작가이자,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석사과정 중에 있다. 콘텐츠 기획·제작 현장 경험과 국악에 대한 학문적 탐구를 바탕으로 공연문화예술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의미를 중점적으로 읽어내고자 한다. (lhyoung0501@gmail.com) |
| 이하영 |
| 국악 전문 방송 프로그램과 문화예술 방송 프로그램 작가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문화예술 방송 프로그램 작가이자,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석사과정 중에 있다. 콘텐츠 기획·제작 현장 경험과 국악에 대한 학문적 탐구를 바탕으로 공연문화예술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의미를 중점적으로 읽어내고자 한다. (lhyoung0501@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