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s
Korean

A
English
웹진 山:門 2025 겨울
REVIEW
리뷰┃움직이는 아카이브
진윤경 렉처콘서트 <피리, 산조의 길에 들어서다>
성혜인


교차하는 긴장

산조는 음악가가 지닌 역량을 가늠하는 핵심 지표가 되곤 한다. 자신이 학습한 산조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숱한 독주회나 산조 전 바탕을 음반으로 기록하는 오랜 관행만 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산조는 한 시기의 음악적 완성도를 공식화하는 여러 의례 행위의 합리적 근거로 작동한다. 한편, 산조는 오랫동안 ‘전승’의 정당성을 동력으로 ‘재현’되어 온 탓에 음악가의 적극적인 해석이 쉽게 가닿지 못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물론 음악가의 개성을 미세한 층위에서 포착할 수 있긴 하지만, 의도가 전제된 능동적 해석이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과거의 산조가 언제나 현재적 의미의 유동적인 창작물이었던 것과 달리, 오늘날의 산조는 유파의 틀을 고정된 규범으로 간주하는 반복적 재현에 가깝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산조를 감상하는 관객의 태도도 획일화되거나 경직될 수밖에 없다.

진윤경 렉처콘서트 <피리, 산조의 길에 들어서다>는 20세기에 피리 산조를 만든 정재국과 박범훈을 조명하고, 그들의 산조를 진윤경의 연주를 통해 들어보는 자리였다. 교육자이자 연구자인 진윤경의 면면을 적절하게 반영하는 기획처럼 보였다. 그러나지 질문도 뒤따랐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산조가 아닌 두 명인의 산조를 공연의 중심에 위치시켜 산조를 동원하는 타 공연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살아 있는 명인을 직접 무대로 소환함으로써 산조의 역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지식 전달에 방점이 찍힌 ‘렉처콘서트’라는 형식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모종의 권위가 느껴지기도 했다. 이처럼 <피리, 산조의 길에 들어서다>는 여러 맥락 속에서 특수한 긴장을 내포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므로 나의 관심은 앞서 언급한 다양한 층위의 긴장이 어떠한 선택과 전략을 통해 조율되고 해소되는지를 묻는 것으로 자연스레 향했다. 전승과 재현이라는 고착된 권위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명인으로부터 발생하는 권위와 협상하고 경합하며 자신만의 서사를 재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이러한 긴장과 위계적 감각을 내면화할 것인가? 만약 자신의 서사를 재구성했다면 그가 취한 태도와 전략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단순히 공연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차원을 넘어, 산조의 담론적 위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윤경은 사려 깊은 방식으로 이 물음들을 하나씩 주파해 나갔다.

 

과거를 주파하는

공연은 명인과의 대담과 해당 유파의 연주가 번갈아 진행된 뒤, 짧은 관객과의 대화로 마무리되는 평이한 형식이었다. 다만 연주 후 대담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담 후 연주가 이루어지는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구성을 취하고 있었는데, 진윤경의 연주를 대담 뒤에 배치하는 이러한 구성은 다분히 교육적 뉘앙스로 읽혔다. 관객들은 각 유파별 산조의 형성 배경과 문제의식을 토대로 일정한 해석의 틀을 갖춘 상태에서 진윤경의 연주를 맞이하게 된다. 산조에 접근하는 정성적 가이드를 미리 제공받는 셈이다. 이후 앞선 세대가 구축한 음악적 유산이 다음 세대 음악가의 몸을 통해 어떻게 구현되는지 보여주며 세대 간 관계성을 무대 위에 드러낸다.

이러한 구성 속에서 두 명인의 서사는 자연스럽게 공연의 방향성을 규정하는 핵심 축으로 떠올랐다. 정재국은 서른 살 무렵 피리의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2시간 남짓의 피리 독주회를 선보인 인물이다. 1972년에 열렸던 해당 독주회는 최초의 피리 독주회였다. 담담한 목소리로 과거를 회상하던 그는 피리 독주 자체가 생경하게 다가오던 시절이었기에 독주회가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고 언급했다. 그는 독주회에서 정악뿐만 아니라 산조와 협주곡을 두루 선보였는데, 특히 오진석과 이충선의 가락을 바탕으로 만든 그의 산조는 피리라는 악기를 알리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또한 정악의 전통을 이어온 음악가가 산조나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은 당시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므로, 그의 독주회는 정악과 민속악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어떤 음악이든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음악적 신념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반면, 박범훈은 중학교 시절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다 피리에 입문한 독특한 인물이다. 대금이 마음에 들었지만 키도 작고 손도 작으니 피리를 하라는 조언을 따르게 됐다며 호쾌하게 웃어 보인 그는 스승 지영희 명인의 영향 속에서 다양한 음악적 기반을 다졌던 과거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당시 피리는 음역이 좁아 산조에 적합하지 않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지만, 박범훈은 이를 적극적으로 돌파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이어갔다. 그 결과 스승 지영희로부터 배운 경기 시나위 가락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김새와 특수 주법 등을 엮어 20분 남짓의 새로운 피리 산조를 구축했다. 피리 산조는 피리로 연주했을 때 피리의 고유한 특성이 가장 자연스럽게 배어 나와야 한다는 신념 아래 피리의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데 집중했고, 그 결과 독자적인 어법을 갖춘 피리 산조를 완성했다.

진윤경은 두 명인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넓혀 온 피리 산조라는 유산을 자신의 언어로 재배치했다. 이전 세대가 구축한 산조를 하나의 고정된 틀로 바라보기보다 그 안에서 파생될 수 있는 다양한 언어를 탐색하는 데 집중한 것이다. 반주자와의 밀도 높은 호흡을 중심에 두고 ‘원전과의 거리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무대 위로 호출함으로써, 그는 원전의 권위를 답습하지 않은 채 전승, 변주, 확장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며 원전의 의미를 새롭게 드러냈다. 진윤경의 연주에서 감지되는 특유의 기세와 추진력, 영민함은 이러한 탐색의 가장 큰 동력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원전과 거리를 두며 새로운 틈새를 적극적으로 찾아내려는 일련의 도전이 결국 ‘존중’과 다르지 않다는 듯 연주를 이어갔다. 고정성과 권위를 지키는 데만 머무르는 전승은 결국 동력을 잃고 만다. 진윤경은 세대별 다양한 음악가들이 원전에 균열을 내며 자신만의 해석적 공간을 확보하는 과정이 전승의 핵심적 동력임을, 그리고 이러한 균열의 축적 속에서만 산조가 비로소 생동할 수 있음을 환기한다. 관객들은 그의 연주를 통해 산조가 어떻게 전승되고, 어떤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즉각적으로 체감하지 않았을까? 또한 전승은 단순히 기술을 전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전 세대의 미학적 태도를 바탕으로 음악가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선언하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을까?

 

아카이브의 미래

진윤경 렉처콘서트 <피리, 산조의 길에 들어서다>는 명인들의 구술과 다음 세대의 연주가 함께 자리한다는 점에서 작은 아카이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산조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이어져 왔는지를 드러내며 전승의 살아 있는 힘을 직접 감각하게 만들고, 나아가 오늘날 산조가 다층적이고 역동적인 전승 담론 속에서 여러 실천을 포괄하는 음악이라는 사실을 조금 더 직관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산조를 바라보는 태도가 산조가 발을 딛고 있는 토양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공연은 훨씬 열린 형태로 작동하는 아카이브로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공연이 끝난 직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악기는 사회 속에서 사람과 관계를 맺는 물건이라는 사실이었다. 악기의 운명은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에 따라 바뀐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 말이다. 같은 악기라 할지라도 그 악기를 다루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에 따라 악기의 모습도, 나아가 음악의 모습도 바뀔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악기도 음악도 사람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실천임을 확인할 때마다 산조라는 아카이브도 ‘보존’과 ‘기록’이라는 목적을 넘어서는 무엇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나아간다. 산조라는 아카이브의 도래할 미래의 가능성들은 우리에게 어떤 장면을 선사하게 될까?​​ 

성혜인
음악비평동인 ‘헤테로포니’ 필진,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위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이다. 음악과 공연예술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문화적 실천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강의, 방송, 자문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성혜인
음악비평동인 ‘헤테로포니’ 필진,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위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이다. 음악과 공연예술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문화적 실천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강의, 방송, 자문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위젯
인스타그램
월간일정 위젯
월간일정
오시는길 위젯
오시는길
주차안내 위젯
주차안내
대관서식 위젯
대관서식
문의하기위젯
문의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