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소리의 실험 지형 최전선에서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판소리의 실험 지형도를 그리라고 한다면, 박인혜와 그가 이끄는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의 이름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소리꾼 박인혜가 보여준 판소리에 대한 태도는 분명하다. 판소리를 ‘전승·보존’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창작’의 도구로 보기 때문에 작창을 시작으로, 작가, 연출, 실연을 넘나들며 판소리 창작에 매진해왔다. 박인혜를 중심으로 결성된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는 판소리 1인극·창극·뮤지컬·드라마를 넘나들며 판소리의 특수성을 살려, 전통을 넘어 보다 한국적인 음악극을 만들고 있다.
박인혜와 놀애박스의 대표작은 ‘무속 서사–근대 단편’의 두 축으로 배열된다. 첫째, 무속·설화에 기반한 판소리 음악극, <오버더 떼창: 문전 본풀이>와 <종이꽃밭: 두할망본풀이>를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무속 서사·여성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배치하며, 죽음·돌봄·생명 순환을 다루는 서정적 무대로 호평을 받았다. 이 작업은 전통 서사(본풀이)를 현대 음악극 어법과 연결함으로써 ‘근대 단편’에 초점을 둔 <쑛스토리>와 나란히 놀애박스의 또 다른 축으로 언급될 수 있다. 둘째, 구전 레퍼토리의 재해석에 머물지 않고 단편소설을 판소리로 재구성한 <판소리 쑛스토리> 시리즈는 놀애박스의 대표작으로 그간의 축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프로젝트 중 하나다.
사유를 안내하는 소리극
12월 19일과 20일 양일간에 서울남산국악당에 올려지는 <판소리 쑛스토리3 - 현진건 편>은 그간의 실험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다. 앞선 시리즈가 프랑스 작가 모파상의 단편소설을 1인극 판소리로 선보였다면, 이번 신작은 현진건의 대표적인 세 작품 『운수 좋은 날』, 『그립은 흘긴 눈』, 『정조와 약가』 세 작품을 1인극과 다인극 형식으로 풀어낸다. 네 명의 소리꾼 박인혜, 이예린, 황지영, 이해원이 홀로 또는 함께 무대를 이끌며, 현진건의 소설 속에서 그려낸 근대 개인의 삶과 사회를 판소리 언어로 새롭게 조명한다. 박인혜는 여기서 ‘원작자–소리꾼’의 단순한 변주 관계를 넘어선다. 소리꾼은 더 이상 원작을 ‘대신 말해주는’ 전달자가 아니라, 근대적 개인의 균열을 현재 시점에서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일종의 안내자에 가깝다.
현진건, ‘돈’의 시대를 판소리로 다시 읽기
1920년대의 현진건은, 오늘의 언어로 말하자면 ‘근대의 뒷면’을 집요하게 응시한 작가였다. 『운수 좋은 날』의 인력거꾼 김첨지, 『그립은 흘긴 눈』의 기생 채선, 그리고 『정조와 약가』가 호출하는 욕망의 장면들은, 모두 ‘돈이 세상의 새로운 논리’가 된 시대에 가장 먼저 상처 입는 몸들의 초상이다.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는 이 세 편의 단편을 하나의 공연 안에 병치함으로써, ‘돈’이라는 공통 축을 따라 근대적 개인의 세 가지 얼굴을 그려낸다. 김첨지에게는 하루치 벌이가, 채선에게는 빚의 액수가, 『정조와 약가』의 인물들에게는 계급과 체면이 각각의 윤리와 감정 구조를 흔드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 장면들을 소리의 호흡으로 재구성하는 일은, 근대문학에서 축약해버린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다시 확장해 보는 시도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공연이 ‘원작의 감동을 판소리로 옮겼다’는 수준의 홍보 문구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판소리는 본래 인물의 내면과 상황의 아이러니를 긴 호흡의 노래와 발림, 아니리의 삼위일체로 입체화시키는 예술이다. 놀애박스의 작업은 이 고유한 문법을 통해 근대 서사가 가진 냉정한 문장들 사이의 공백을 메우고, 말해지지 않은 정조를 탐색하는 쪽에 더 가깝다. 그 결과 음악은 풍성한 리얼리즘을 획득하며 웃음과 풍자, 쓸쓸한 여운이 교차하는 무대로서 오늘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1인극과 다인극 사이, 서사의 새로운 배치
<판소리 쑛스토리 3 – 현진건 편>의 형식적 실험은 ‘1인 소리꾼 중심 구조를 넘어선다’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1인극과 다인극을 오가며 인물과 시점을 분할하는 방향으로 서사를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여러 명의 소리꾼이 한 인물을 나누어 맡거나,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거리에서 말하게 되는 순간, 관객은 자연스럽게 ‘누가 말하고 있는가’를 의식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캐스팅과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근대 서사에 내재한 시선의 편차, 계급과 젠더의 비대칭성을 무대 위에서 가시화하는 장치로 작용할 것이다.
‘판소리적 기획’이란 무엇인가
이 공연을 단순히 ‘좋은 문학 작품을 판소리로 만든 창작 판소리’ 정도로 이해한다면, 놀애박스의 그간 성과를 놓치게 될 것이다. 그의 작업은 언제나 두 개의 축을 동시에 지향해 왔다. 하나는 ‘판소리 장르 내부의 실험’이고, 다른 하나는 ‘판소리와 동시대 관객 사이의 관계 맺기’이다. 그간 놀애박스가 구사해 온 전략은 장단과 선율, 창법에서 전통의 문법을 존중하면서도 판소리 어법 외에 무가나 민요를 이식하여 전통 내부의 소리 세계를 확장시켜왔고, 서사 구조와 무대 구성에서는 과감히 새로운 호흡을 들여오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한 명의 소리꾼이 모든 역할을 떠맡는 방식 대신, 이야기의 중력을 인물과 상황, 정조에 따라 분산시키면서 작은 창극 혹은 소리극이란 장르 속에서 관객이 ‘어디에 감정 이입을 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게 만든다. 이는 판소리가 본래 지니고 있던 ‘청중과의 밀당’을 입체창과 창극으로 이어지는 현대 극장 환경에 맞게 재해석한 시도이기도 하다.
또한, 박인혜는 기획이라는 층위에서도 판소리를 둘러싼 생태계를 고민해 왔다. 상설 레퍼토리라 부를 만한 신작 판소리가 드물어진 환경에서, 시리즈 형식의 프로젝트를 통해 창작과 재상연, 관객 개발을 동시에 꾀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모델 제시이기도 하다. <판소리 쑛스토리 3 – 현진건 편>은 이러한 ‘판소리적 기획’이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점진적 축적의 결과임을 증명하는 자리라 할 수 있다.
격변의 시대,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향하여
이번 공연의 홍보 문구는 ‘격변의 시대, 균열 위 놓여진 근대적 개인의 세 가지 초상’이라는 문장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러나 이 문장을 조금 비틀어 읽어보면, 그것은 곧 지금-여기의 우리에게로 되돌아온다. 불과 한 세기 전의 ‘근대’는 이미 역사의 사건이 되었지만, ‘돈이 모든 가치를 재편하는 시대’, ‘요동치는 변화 속에서 구원받지 못한 이들의 목록이 늘어나는 현실’이라는 키워드는 여전히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와 『그립은 흘긴 눈』의 채선은, 오늘의 비정규 노동자이자 프리랜서 예술가이고, 부채 사회의 한가운데 서 있는 청년일 수도 있다. 『정조와 약가』의 인물들에게서 읽히는 도덕적 딜레마 또한, 플랫폼 자본주의와 불평등 구조로 재현되는 우리 시대의 장면과 겹쳐 읽을 수 있다. 판소리는 이 오래된 인물들을 ‘역사적 인물’이 아닌 ‘지금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 소환하는 예술이다.

그렇기에 <판소리 쑛스토리 III – 현진건 편>은 단지 옛날이야기를 새롭게 즐기는 자리를 넘어, 근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는 한국 사회의 감정 구조를 돌아보게 만드는 작은 장치가 될 것이다.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가 준비해 온 이 무대는 공연장을 들어서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이 이야기들 속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들은, 지금 어느 얼굴로 내 앞에 서 있는가.”
2026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 <판소리 쑛스토리3 - 현진건 편>
일시 : 2025. 12. 19(금) ~ 12. 20(토) / 금19:30, 토14:00, 18:00
장소 : 서울남산국악당 크라운해태홀
문의 : 02-6358-5500
| 이소영 | |
| 이소영은 전통과 현대, 양악과 국악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음악비평가이자 음악학자다. 서울대학교에서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공부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음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는 다르게 듣는다』, 『이소영의 음악비평–생존과 자유』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시대와 장르를 가로지르는 음악 담론을 꾸준히 펼쳐왔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여우락페스티벌, 이소영크리틱뮤지킹 시리즈 등 다양한 무대에서 예술감독과 해설자로 활동하며, 연구와 현장을 잇는 생생한 비평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와 음악연구소NUNC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 이소영 |
| 이소영은 전통과 현대, 양악과 국악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음악비평가이자 음악학자다. 서울대학교에서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공부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음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는 다르게 듣는다』, 『이소영의 음악비평–생존과 자유』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시대와 장르를 가로지르는 음악 담론을 꾸준히 펼쳐왔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여우락페스티벌, 이소영크리틱뮤지킹 시리즈 등 다양한 무대에서 예술감독과 해설자로 활동하며, 연구와 현장을 잇는 생생한 비평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와 음악연구소NUNC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