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신명 나게 탈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마치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지거나 가까운 시일 내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라 여길 수도 있다. 탈춤은 우리 역사와 시간의 궤를 공유하며 예능적·사회적 역할을 수행해 왔고, 풍자와 해학을 담은 서민들의 마당놀이와 민속극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왔다.
하지만 감정을 풀어낼 방법이 훨씬 다양해진 지금, 탈춤을 접하고 해석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은 무엇일까. 지금의 탈춤을 발견하고 일상과 가까운 전통예술을 만들어가려는 시도가 2025년 3월 23일부터 11월 23일까지 격주 일요일마다 서울남산국악당 야외마당 혹은 지하 실내 연습실에서 이어지고 있다. 바로 전국 각 지역의 탈춤을 배우고 장단에 맞춰 신명을 느낄 수 있는 관객 참여 프로그램 <마실가듯 탈춤>이다.
탈꾼과 관객이 함께 부르는 무대
<마실가듯 탈춤>은 탈꾼과 참여자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시작된다. 이름을 주고받거나 오늘의 탈춤을 장황하게 설명하기보다, 다 함께 불림소리를 외치고 곧바로 춤의 세계로 입장한다. 탈꾼의 입 장단과 장구 장단에 따라, 참여자들은 춤을 알든 모르든, 춤을 잘 추든 못 추든 탈꾼이 보여주고 이끄는 대로 바삐 움직이게 된다.
‘마실가듯 탈춤’은 천하제일탈공작소에서 2022년부터 진행해 온 시민 참여 탈춤 워크숍 프로그램이다. 천하제일탈공작소의 젊은 탈꾼들은 각 지역 탈춤의 보존회에 소속된 전문가이자 현시대에 탈춤을 지속하고 새롭게 이어갈 방도를 연구하고 있다. 프로그램은 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 하회별신굿탈놀이, 양주별산대놀이, 은율탈춤, 강령탈춤, 봉산탈춤까지 전국 곳곳의 탈춤 기본 춤사위를 배울 수 있도록 구성된다.
현재 진행되는 <마실가듯 탈춤>처럼 회차마다 두 지역의 탈춤을 한 시간씩, 총 두 시간 동안 배우는 방식을 기본 포맷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기본 춤사위를 배운다 해도 일상의 움직임과는 상이하여 금방 익숙해지기 쉽지 않고, 매회 다른 탈춤을 접하다 보니 수강생들에겐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아쉬움을 달래고 즐거움을 이어가려 프로그램에 여러 번 방문하는 관객도 늘고 있다.
전통 탈춤의 발자취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반으로 이어져 왔지만, 천하제일탈공작소가 보여주는 탈춤의 동선은 뚝섬유원지 한강공원, 서울 문래동의 천탈공간, 금천구 하모니 축제, 다양한 지방 축제로 무대를 넓혀가며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 길을 따라 쌓이는 발자국들이 차곡차곡 축적되고 있다.
이들의 다음 만남은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이루어졌다. 서울남산국악당은 전통예술 기반 공연 및 콘텐츠를 창작하는 예술가 혹은 단체와의 협업을 꾸준히 이어왔고, 천하제일탈공작소와는 2019년부터 협력 인연을 맺어왔다. 전통예술 장르를 전문으로 다루는 공연장과 탈춤을 토대로 동시대 예술을 탐구하는 공연 단체는 올해 여덟 달 동안 관객에게 전통예술 경험을 제공하는 공동기획 프로그램 <마실가듯 탈춤>을 마련했다.
남산으로 마실가는 길에 의미화되는 풍경들
‘마실가듯 탈춤’은 천하제일의 탈춤쟁이들이 함께 춤출 동료들을 찾아 나선 지 5년째 이어온 단체의 대표 프로그램 중 하나다. 허창열 공동대표가 ‘허창열의 일상 탈춤’ 프로젝트에서 밝히듯, 탈춤과 놀이판이 지니는 소통과 상생의 의미를 전하고, 혼자 춰도 즐거운 춤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바로 ‘마실가듯 탈춤’이다. 그렇다면 서울남산국악당과 공동 기획한 <마실가듯 탈춤>은 단지 시기와 장소가 달라지기만 한 것은 아닌가, 기획 과정에 수반되리라 예측되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산이 쌓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과연 여기에 어떤 ‘공동’의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이 뒤따를 수도 있다.
이 프로그램은 오랜 회차를 거치며 세밀한 교습 방식이나 진행 형식에 변동은 있었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천하제일탈공작소 구성원들이 참여자들에게 짧은 시간 동안 탈춤의 기본 동작을 알려준 후 마지막에는 다 같이 흥을 터뜨리는 형식으로 운영해 왔다. 서울남산국악당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공동 기획의 사례를 보자면, 2023년 금천문화재단은 단체와 함께 2개월 동안 <일요일엔, 마실가듯 탈춤>을 운영했다. 금천구의 일곱 개 공간에서 매주 하나의 탈춤을 두 달 동안 배운 참여자들은 금천구 지역 축제인 하모니 축제가 열린 금천구청 앞 도로에서 갈고 닦은 춤사위를 뽐냈다. ‘마실가듯 탈춤’의 변형 혹은 확장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금천문화재단과의 협력은 참여자들로 하여금 한 종류의 탈춤을 어느 정도 긴 시간 동안 몸으로 익힐 기회를 주었고, 지역 축제에 참여한다는 의미까지 더했다. 그렇다면 이번 서울남산국악당과의 기획은 현대 사회에서 전통예술의 고질적 과제인 ‘일회성 경험’이나 ‘원형의 재연’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을까.
하지만 프로그램이 연속된다는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예술단체와 기관의 공동기획은 강점을 지닌다. 창작자의 열의와 재능만으로 프로젝트의 지속을 보장할 수 있는 예술 환경은 낭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던 각양각식의 업무를 적절히 분업해 콘텐츠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이러한 지점은 이번 기획뿐만 아니라, 공간·기관과 창작자·예술가가 함께할 때 기대할 수 있는 긍정적인 시너지다. 더불어, 서울남산국악당을 찾은 관객이 천하제일탈공작소를 만나는 순간, <마실가듯 탈춤> 판의 춤사위는 천탈공간을 넘어 바깥까지 확대된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역사와 자연이 축적한 풍경을 볼 수 있는 남산골한옥마을에 위치한 공연장의 지리적 이점이 모객과 관객층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름의 더위와 춤의 열기가 충돌하기 전까지는 1층 잔디마당이나 야외마당 등지에서 춤판이 열렸는데, 국악을 전문으로 하는 공간에서 마주하는 탈춤은 이질감을 줄이고 보다 적극적인 인식과 접근을 가능케 한다.
함께일 때 더 멀리 가는 춤
‘마실가듯 탈춤’은 무대와 객석으로 분리된 관계가 아닌,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몸을 들썩이며 신명을 공유하고 싶었던 젊은 탈꾼들의 소망에서 시작했다. 프로그램의 참여자와 인원은 매번 달라진다. 산책도 기분과 날씨에 따라 나가기도 하고, 가려다 말기도 하는 것처럼. 탈춤을 추려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일요일의 탈춤 마실은 시작된다. 그 한 사람은 춤 좀 출 줄 아는 관객일 수도, 전혀 모르는 초행일 수도, 혹은 아무도 오지 않은 자리에서 홀로 춤추는 탈꾼일 수도 있다. 여럿이 추면 더 신나겠지만, 춤은 혼자서도 출 수 있다. 춤추는 탈꾼들이 여기에 있다는 메시지는 천하제일탈공작소가 꾸준히 전하려는 것이다. “아무도 오지 않으면 혼자 춤추고 돌아가면 된다”라는 마음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관객 혹은 방문객에게도 마실가는 것 이상의 의무감과 숙제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 간편하고 느슨한 듯한 탈춤 마당이 제공하는 것은 단지 춤사위를 이해하거나, 전통예술 춤사위를 체험하고 얻은 땀방울만이 아니다. 탈을 쓰고 극을 연행하는 중심에는 탈꾼이 있다. <마실가듯 탈춤>은 천하제일탈공작소의 연희자들을 위한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프로그램은 각자의 예술적 자원 중 일부분을 활용하여 전개된다. 덕분에 다른 무대나 프로젝트에 비해 개인의 기반을 다지고 준비에 골몰하는 시간이 적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산책에 나서는 이들은 관객만이 아니다. 이 탈춤배움터에서 함께 재미있게 춤추자는 간결하고도 중요한 일 순위 목표가 오히려 탈꾼에게 필요한 원동력인 셈이다. <마실가듯 탈춤>은 편안함과 즐거움 속에서 긴 호흡으로 지속하는 춤인 것이다.
‘전통’이라는 개념 아래 장르와 작품에 지우는 보존과 보호의 의무는 자유와 충돌하면서도 동시에 틀의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사실 탈춤이 무대화되기 전에도 매일 마당에서 연행된 게 아니듯, 동시대 삶의 리듬 속에 탈춤 장단이 자연스레 들어설 시간을 새로 마련하는 것, 그것이 서울남산국악당과 천하제일탈공작소가 지금의 탈춤을 관객에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다만, 기관 성격상 프로그램의 내용과 방향을 예측할 수 있고, 기관을 경유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는 관객에게 탈춤에 관한 새로운 상상력을 더해주기에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두 손을 맞잡고 있을 때 박수 소리는 나지 않더라도, 팔이 이어지면 더 먼 곳까지 손을 뻗을 수 있다. <마실가듯 탈춤>은 우리에게 주어진 유산이 예술가와 관객을 연결하는 풀이 되어 관계의 매듭이 연장되는 모습을 기대하게 만든다.
<마실가듯 탈춤>은 서울남산국악당에서 2025년 11월 25일까지 진행되며, 서울남산국악당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신청 후 참여할 수 있다(상황에 따라 현장 접수 가능). 천하제일탈공작소의 <마실가듯 탈춤>은 이후에도 춤을 출 수 있는 어느 공간에서든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오는 12월에는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들’과 공동 작업하여 지난해 11월에 초연한 <춤이 되고 말이 되고>를 서울남산국악당 무대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