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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山:門 2025 가을
REVIEW
리뷰┃한국과 일본이 전통예술로 맺어온 축제의 시간
광복 80주년 기념 서울남산국악당 공동기획 <축제의 땅>
송현민


<축제의 땅>에는 ‘인연이 빚은 잔치’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한국의 춤꾼들과 악사들, 일본 나고야에서 온 ‘놀이판’이 함께 한 토요일이었다. 놀이판은 1985년 재일동포들이 다음 세대에게 한국의 전통예술을 알려주고자 시작한 일본의 조선인 모임이다.

 

 

나고야의 ‘놀이판’, 축제의 땅을 깔아오다 
1980년대 초, 나고야 주변에 남아있는 전쟁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강제징용으로 건설된 군사시설의 흔적을 조사·연구하는 시민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 활동을 함께 한 사람들이 공동 보육소를 만들어 아이들을 함께 키우게 된 것이 ‘놀이판’의 시작이었다.
 
1985년 여름부터 그들은 ‘재일 교포 3세에게 민족 교육을’이란 구호로 놀이판이라 이름을 짓고 사물놀이를 가르친다. 선생이 없어 한국에서 배워 온 이에게 배우거나 비디오와 CD로 가락들을 흉내 냈다. 국경을 넘은 장구 소리는 일본 내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도 넘나들며 일본인들이 입회하기도 한다.

1995년 여름부터 놀이판이 커졌다. 김운태(채상소고춤)와 노름마치를 초청해 합숙하며 농악을 연습했다. 모임은 나고야를 넘어 전역으로 퍼지며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축제가 되었다. 매해 9월마다 열리는 나고야의 이마이케마쓰리(今池祭り)에 참가하여 한국의 춤과 음악을 알리며 모두의 축제가 되게 했다.

1997년 11월에는 기후현 마루야마 댐 공사에 강제동원되어 죽은 한국인들을 위한 마루야마 진혼제를 펼쳐졌다. 남해안별신굿의 정영만이 주도하고, 나고야 동별원(東別院)에서 김주홍과 노름마치가 풍물굿을 올렸다.

2000년 2월에는 놀이판의 공동설립자 이나가키 마사토가 입원했다. 죽음을 앞둔 그의 소원은 장사익의 콘서트를 여는 것이었다. 공연은 나고야의 라이브클럽 도쿠조(得三)에서 열렸고, 이나가키 마사토는 5일 후에 눈을 감았다. ​

  

2003년 7월, 나고야에서 <축제의 땅에서>가 올랐다. 놀이판 18년의 역사를 자축하는 자리였다. 18년 전에 장구를 맸던 아이는 엄마가 되었고, 아이가 어머니의 장구를 물려받았다. 이듬해인 2004년 8월에는 <축제의 땅에서>란 이름으로 첫 내한 공연이 성사되었다. 2010년 8월에는 <한일판굿-인연이 빚은 잔치>(한국문화의 집)를 공연했고, 그간 일본으로 건너가 놀이판에 교육을 베푼 선생과 명인들을 일본으로 초청해 2011년 1월 <백년의 약속>을 나고야 예술창조센터에 올렸다. 2017년 8월, 놀이판은 <축제> 공연(한국문화의 집)에 초청되고, 인사동에서 풍물을 울렸다.

2025년은 놀이판 창단 40주년인 해이다. 한국은 광복 80주년, 일본은 종전 80주년, 한일수교 60주년. 만감의 역사가 교차하던 8월, 놀이판은 창단 40주년 공연을 서울남산국악당에서 가졌다. 이를 위해 5월부터 김운태와 연희단팔산대에게 농악을 배우고, 영상통화로 틈틈이 연습했다. <축제의 땅>은 8월 16일 오후 3시와 7시에 펼쳐져, 30년 동안 놀이판과 함께 한 한국의 예인들이 총출연했다. 기획과 연출을 맡은 진옥섭은 “마개를 금방 딴 신명이 폭죽처럼 터지는 축제”라고 장담했다. ​

이국땅에서 세대를 이어가는 전통예술
3시 공연에서 김주홍, 장인숙, 장유정, 고연세, 김연정, 김운태, 장사익 그리고 놀이판의 멤버들이 달궈놓은 열기는 7시까지도 이어지는 것 같았다. 각 공연은 출연진이 달랐다. 다만 놀이판은 3시 공연에 이어 7시 공연에서도 ‘학춤’과 ‘판굿’을 선보였고, 장사익도 두 공연에 모두 함께했다.

조성돈의 ‘소고춤’이 축제를 연다. 진옥섭 왈 “꽃을 이고 춤을 추는 남자”란다. 흔히 광대들의 무대를 깔아주는 판광대(기획자)로서는 치밀하고, 광대들의 무대를 열어주는 말광대(해설자)로서는 말과 말 사이에 웃음을 끼워 넣는다는 그다.

진옥섭은 저서 『노름마치』에 수록된 이윤석, 황재기 등의 사진 밑에 ‘춤추는 사내들’이라고 적어 넣었다. 그중 한 명이 황재기(1922~2003)인데, 조성돈은 황재기로부터 꽃을 이고 추는 춤(소고춤)을 배웠고, 1980년대 채상소고에 춤가락을 더해 자기 춤으로 다듬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처럼, 작은 북(소고) 역시 맵다. 연신 두드려 흥을 돋운다.​

 



이어진 순서는 일본에서 건너온 놀이판의 ‘학춤’이다. 피아노곡 ‘라 캄파넬라’가 등장하며 분위기를 전환하고, 놀이판 멤버들은 도포를 펄럭이며, 수직으로 껑충껑충 뛰어오르며 한 발짝씩 나와 오와 열을 갖춘다. 아주 섬세하고 고도의 훈련으로 정제된 춤사위는 아니다. 그런데도 참으로 값진 무대였던 이유는 나이든 학부터 어린 학까지 함께 했다는 점이다. 어린 학은 어림잡아 6살쯤으로 보인다. 아마도 걸음마를 뗀 다음 그 꼬마는 한국춤을 재밌게 배웠을 것이다. 그 어린 학도 어느 순간에는 자식을 품고, 걸음마와 함께 학춤을 가르쳐줄 것이다. 

놀이판 멤버들이 학춤을 배울 때, 아마도 녹음된 음원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음악광대로 무장한 반주단의 흥은 그들이 학춤을 출 때 한 뼘씩 더 높이 뛸 수 있는 흥의 돋움대를 만들어주었다. 

 

놀이판의 든든한 지지자(박찬호)를 추억하며 
<축제의 땅>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니 박찬호이다. 대중음악연구자 이준희가 나와서 박찬호의 업적을 소개하고 인연을 추억한다. 2024년에 고인이 된 박찬호는 1943년 일본 나고야 출생이다. 와세다대 문학부를 졸업했고 재일 한국학생동맹과 재일 한국청년동맹 활동, 1977~1984년 민족시보사 편집차장과 편집장을 역임했다. 박찬호의 저서 『한국가요사』는 1987년 일본어로 간행되고, 1992년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이후 증보되어 2009년에 2권의 묵직한 책으로 나왔다. 그는 이전까지 야화·회고담 중심이던 가요사 연구를 사료 기반의 학술서로 끌어올리며 학계의 지평을 넓혔다. 생전에는 놀이판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이준희는 ‘번지 없는 주막’을 부른다. 1940년 백년설이 부른 노래이자, 박찬호가 생전에 즐겨 부른 노래란다. 이준희의 목소리가 묘했다. 날끼와 지기(知氣)가 겹친, 선비와 광대 사이의 묘한 레이어다. 여러 논문을 쓴 학자로서의 먹물이 흐르면서도, 취기로 몰아가는 알코올의 휘발성이 담겨 있었다. 3시 공연에서는 장유정이 박찬호를 추억했다.​

 

흥이 한을 넘고, 흥이 아픔을 녹였다
<축제의 땅>이 다시 춤으로 물들었다. 김혜윤이 선보인 ‘교방굿거리춤’은 김수악이 최완자에게 배운 굿거리에 김녹주에게 배운 소고놀이를 절묘하게 합쳐 만든 춤이다. 맨손으로 추다가, 너풀거리는 치맛자락을 허리끈으로 질끈 동여맨 김혜윤이 소고를 들고 연신 두드리며 흥을 돋운다. 흥이 덮은 땅에는 슬픔이 녹아들기도 했다. 특히 놀이판이 오간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아픔과 슬픔의 역사가 녹아 있다. 그러니 닦아내야 할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박영수의 ‘살풀이’는 더욱 애절했다. 손에 들린 수건으로 문질러 그 역사적 아픔이 닦여나가길 바라는 몸부림이었다.

이윤석의 ‘덧배기춤’은 화려하지 않은데, 가장 화려한 박수를 받았다. 그는 힘과 멋을 빼버리고 춤을 춘다. 아니, 오히려 털털거리는 듯한 춤으로 형식적인 멋을 다 털어내는 것 같다. 덧배기춤에서 ‘덧’은 거듭이라는 뜻이고, ‘배기’는 박다라는 뜻이다. 하여, 땅을 꾹 찍어 누르는 배김새가 인상적이다. 이윤석은 다리와 하체를 ‘척’하고 움직여 단단히 자리를 잡은 뒤, 상체를 강하게 다시 한번 ‘척’하고 흔들어 상체의 힘이 하체로 전달했다. 상체의 힘이 아래로 전달되어 땅을 다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살이 풀리고(살풀이), 덧배기춤으로 땅이 다져졌으니 기뻐해야 할 차례다. 한잔 들이켜야 하지 않은가. 박경랑의 ‘교방소반춤’이 나온다. 춤꾼의 머리에 얹어진 소반 위로 술이 넘실거리는 술잔이 놓여 있다. 이것을 엎지르지 않게 하는 ‘기술’이 어느새 춤사위의 ‘예술’로 승화된다. 권주잔을 받아 마시면 모든 액운이 사라진다는 정영만의 노래와 함께 박영랑이 어느 관객 앞으로 가고, 관객은 술잔을 들어 비운다. 박경랑은 이고 있던 소반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비녀를 뽑아 소고처럼 두드렸다. ​

 



한‧일 축제에 띄운 흥의 달을 상상하며 
‘한’과 함께 흐르면 느리지만, ‘흥’과 함께 흐를 때 물살처럼 빠른 것이 시간이다. 2시간이 훌쩍 넘었다. 농악대 악기와 대열을 갖춘 놀이판이 관객석 뒤에서 등장했다. 꽹과리‧장구‧북‧징을 울리며 무대로 서서히 걸어 내려가는 그들을 보며, 그들이 일군 사십 년의 시간이 떠올랐다. 고난도의 기교로 돌리는 상모가 아니더라도, 북채와 장구채의 화려한 기교가 아니더라도 앞서 본 ‘학춤’처럼 그들이 지나온 길을 상상해 보고 떠올리게 했다. ‘저 속에 김주홍이 들어가 함께 했겠구나’ ‘조성돈이 상모를 움직이게 하는 법을 가르쳤겠구나’ 등 이번 축제를 함께 한 이들이 섞여 있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장사익의 무대가 끝을 맺었다. 20세기 아리랑이 있었다면, 그의 ‘찔레꽃’은 21세기의 아리랑이다. 진옥섭은 공연 초입에 “여러분들 도망 못 가도록 장사익 선생을 가장 마지막 무대로 잡아두었습니다”라고 했는데, 장사익이 아니었더라도 그 자리에 모두 있었을 것이다. 축제의 시간이었고, 우리가 모르던 역사가 흘렀고, 양국이 춤과 소리로 물들인 순간이었으니, 누가 이런 놀이판을 마다할 것인가? 토요일 밤, 축제의 땅에는 어둠이 짙게 깔렸고, 모인 이들이 흥의 달을 띄웠다. 그들의 흥은 막이 내려도 이어질 것 같았다. 모두 하나 되어 40주년 맞은 놀이판의 역사와 미래를 축하하며 막을 내렸다. 이번 공연은 한일 양국이 깐 축제의 ‘땅’에서, 새로운 감흥과 감동이 요이 ‘땅!’한 시간이었다.​
송현민
음악평론가, 월간 <객석> 편집장. ‘한반도의 르네상스’를 주장했던 음악평론가 박용구론으로 제13회 객석예술평론상을 수상했고, 충실한 ‘기록’이 미래를 ‘기획’하는 자료가 된다는 믿음으로 활동 중이다
송현민
음악평론가, 월간 <객석> 편집장. ‘한반도의 르네상스’를 주장했던 음악평론가 박용구론으로 제13회 객석예술평론상을 수상했고, 충실한 ‘기록’이 미래를 ‘기획’하는 자료가 된다는 믿음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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